글로벌 리더

미국 패코철강의 백영중(80세) 회장

부산갈매기88 2010. 5. 19. 07:48

그는 26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성실과 신념 하나로 철강회사를 일군 해외 동포 기업인이다. 백영중 회장은 "젊은 시절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이익을 얻기 위해 신뢰를 어기면 반드시 실패한다."며 "성실과 정직으로 이 세상에서 얻지 못할 것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고향인 평안남도 성천에서 농고를 나와 잠시 평양중학교 교사를 하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그는 군밤 장사를 하며 연희대(현 연세대)에 입학했다. 학비가 없어 대학을 중퇴한 그는 1956년 흥사단 장학생으로 단돈 50달러를 가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고생 끝에 미국 오리건대 물리학과와 인디아나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수많은 기술과 공법을 개발, 5개의 미국 연방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그가 1979년 미 연방특허청에서 특허 받은 '주름형 빔(Corrugated Beam)'은 세계적 발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세운 패코철강의 현재 연간 매출은 2억달러(약 2000억원) 정도. 아칸소주에 4만여평의 공장을 가진 이 회사는 미국 경량 철골 판매 부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당신들이 꿀 수 있는 가장 큰 꿈을 품으십시오. 불가능은 없습니다. 현명한 목표를 세우고 한걸음 한걸음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그 보답이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기업들에 "기업은 자신만의 고유한 기술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기업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고유한 기술은 창의성과 근면의 열매"라고 충고했다. 백 회장은 1999년 미국의 종합 회계법인인 Ernst& Young사가 주관하고 CNN, USA 투데이 등이 후원하는 '올해의 기업인(Entrepreneur of The Year)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선정됐다. 수상 이유는 군밤 장사로 출발해 미국 최우수 기업인 반열에 오른 점, 시장을 보완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조한 점, 산업 창출에 공헌한 점이 인정됐다.

 

그는 165㎝ 남짓한 작은 체구지만 그의 행동과 말씨는 아이(I)빔 철강처럼 장중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는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들려달라는 부탁에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 내 뒤에 오는 젊은 벗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저당잡혀 젊은이의 무한한 가능성을 묻어버리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50달러를 들고 시작한 백 회장의 아메리칸 드라마는 한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인이 발붙이기 쉽지 않은 미국의 전통 산업분야인 철강업계에서 '고객 전부주의'라는 전략과 성실성으로 세계시장을 개척한 내용은 감동적이다.

 

패코 철강은 미국 주택용 철강 분야에서 현재 시장 점유율 60%를 차지하고 있다. 연 매출 2억달러 미국 경량 철골 분야에서 판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974년에 내 성(백)의 영문 표기(Paik)와 회사(Company)란 영어 단어의 앞에서 각각 알파벳 2개씩을 따서 패코(PACO)철강을 창업했다. 주력 제품은 '주름형 빔(Corrugated Beam)'이다. 주름이 잡힌 함석판의 강도가 높아지는 원리에 착안한 것으로 같은 두께의 철판이라도 주름을 잡으면 강도가 2∼3배 강해지고 무게가 25∼30% 이상 줄어드는 이치를 활용한 것이다. 이 제품이 상용화되면서 세계적인 용접 빔 철강업체로 급부상했다.

 

6·25전쟁이 한창인 56년 흥사단 추천으로 26세 때 미국으로 갔다. 그는 식당에서 접시를 나르는 버스 보이 생활을 했는데 식사시간 30분을 주면 10분 이내에 식사를 끝내고 나머지 20분은 일을 했다. 손발이 퉁퉁 붓는 데도 힘들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식당 주인에게서 '너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오리건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인디애나대 공대 토목공학과를 다시 다녔다. 영어는 '지독하게'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교수들의 배려로 대학원생으로부터 특별 지도를 받기도 했다.

 

첫 사회생활은 오하이오주의 벤워트 카운티 기술공무원이었다. 3년간의 기술공무원 경력과 미국 생활 기반을 다졌다. 62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슐레철강 회사에 엔지니어로 스카우트되면서 철강 제품과 인연을 맺었다. 슐레 철강에서의 직장생활은 평생 비즈니스의 기반을 다지는 기회가 됐다. 당시 베트남전쟁이 일어나면서 철강 수요가 늘어난 데다 개발한 조립식 철강 구조물이 큰 인기를 끌었다. 철강 구조물들은 지금도 팩스 니(Paik's Knee)로 불릴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런 성공은 소수민족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던 영업 활동을 미국 주류 사회를 대상으로 벌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내 경험과 열정을 모두 바치고 그 위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태 내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재벌의 전무가 되는 것보다 조그마한 기업이라도 오너가 되고 싶었다. 미국에서 나의 꿈을 펼치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마흔넷에 집에다 전화기 한 대 들여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회사를 설립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일본 노무라무역으로부터 철강 제품을 위탁 생산받아 이를 미국 회사에 판매하는 사업이었는데 첫 거래를 트기가 쉽지 않았다. 신설회사 제품을 쓰면 제품의 안정적 공급에 차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패코의 여신 한도는 1만 달러였다. 그러나 노무라는 120만 달러어치의 제품을 믿고 맡겼다. 훗날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당신의 뜨거운 가슴을 믿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후 패코철강 제품이 좋다는 평판이 내려지면서 석달 만에 120만 달러어치를 파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3년 후 77년에는 미국 서부 7개 주 전체 시장의 50%를 장악했다."

 

자신의 성공비결을 '고객 전부주의'라고 말한다. 당시만 해도 좋은 물건만 많이 만들면 팔린다는 생각이 많았다. 고객을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기기 위한 수단으로 봤던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보다 고객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충분히 고려한 후에 물건을 팔려 노력했다. 사업을 하다보면 손해를 볼 때도 있다. 그때마다 신용은 생명처럼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버텨온 것이 성공 비결이다.

 

세계경제는 완전히 바뀌고 있다. 경제에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살아남으려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제시장의 냉혹한 현실과 질서를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에서 사업에 성공한 크리스천이다. 세 가지 계명을 강조하고 싶다. 첫째, 죽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자. 둘째, 열심히 일하고 주인같이 살자. 노예처럼 불평하며 살지 말자. 셋째, 서로 사랑하자. 의견이 달라도 헤어질 때는 빙그레 웃자. 이 세 가지 정도는 지키며 살아야 할 것 같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부탁한다. 목표를 세우고 전진하라.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어라. 노력하면 반드시 이뤄진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도우시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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