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많은 백만장자들을 키워냈던 강철 왕, 안드류 카네기는 의사나 산파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태어났다. 그런 혜택을 받기에는 부모가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일할 때는 시간당 2센트를 받으며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4억 달러를 가진 갑부가 되었다.
그의 출생지인 스코틀랜드 둔펄라인의 오두막집에는 방이 두 개로 1층은 아버지가 천을 짜는 일을 하는 공장이었고, 온 가족은 위층의 협소하고 어둠침침한 다락방에서 음식을 먹고 잠도 잤다.
카네기 가족이 미국에 왔을 때 앤드루의 아버지는 식탁보를 만들어 집집마다 다니며 팔았다. 어머니는 세탁 일과 더불어 떨어진 신발을 기워 돈을 벌었다. 앤드루는 셔츠가 한 벌밖에 없어서 어머니는 매일 밤 아들이 잠자리에 든 이후에 셔츠를 빨고 다렸다. 어머니는 하루에 열여섯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을 일해야 했고, 앤드루는 그런 어머니를 존경했다. 스물두 살이 되자 앤드루는 어머니가 살아 있는 한 자신은 결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약속했다.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30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52세의 나이에 결혼을 했고 처음이자 유일한 아이가 태어난 것은 62세 때였다.
어렸을 때 그는 어머니에게 자주 이렇게 말헀다.
“어머니, 저는 이다음에 부자가 되어 어머니께서 비단옷을 입고 하인을 거느리며 전용마차를 타고 다니시게 하겠습니다.”
또한 자신의 지적인 능력은 온전히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위대한 성공을 이끈 추진력이었다는 말도 자주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너무나 슬픈 나머지 무려 15년 동안 어머니의 이름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한번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한 늙은 여인의 빚을 대신 갚아준 적도 있었다. 단지 어머니를 닮아서였다.
앤드루 카네기는 강철 왕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정작 강철 제조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자신보다 강철에 관해 더 잘 아는 수백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다룰 줄 알았으며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조직을 만들고 리더십을 발휘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일하게 만드는 것에 놀라운 소질을 보였다.
카네기는 피츠버그에서 전보를 날라다주는 일을 했다. 급료는 하루에 50센트였다. 그 정도면 큰돈이었다. 당시 그 도시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길을 잘 몰랐기 때문에 전령 일자리를 잃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도시의 사무실 지역에 있는 모든 회사의 이름과 주소를 모조리 외었다. 또한 전신기사 되고 싶었기에 밤에는 전신 기술을 공부했으며, 다음 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사무실로 달려가 실제로 전보치는 연습을 했다.
어느 날 아침에 굉장한 뉴스거리가 생겨 전신 일이 폭주했다. 필라델피아에서 피츠버그로 미친 듯이 전보가 날아왔다. 하지만 마침 그 시간에 근무 중인 전신기사가 없었다. 그래서 앤드루가 전신기로 급히 달려가 전보를 받아서 전달해주었다. 덕분에 급류가 두 배나 많은 전신기사로 승진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활력과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펜실베니아 철도 회사는 자체 전신선을 세웠다. 앤드루는 그곳의 전신기사가 되었고 이후 구역 감독의 개인비서로 승진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앤드루에게 부를 안겨주게 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한 투자자가 기차에 타고 있던 앤드루의 곁에 다가와 앉아서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침실 객차 모델을 보여 주었다. 당시의 침실 객차는 화물 객차 양옆에 붙어 있는 조잡한 침대칸이었다. 그 투자자가 보여준 발명품은 오늘날의 풀먼식 차량(침대설비가 되어 있는 차량)과 흡사했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인 특유의 뛰어난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 발명품은 가능성, 그것도 아주 엄청난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돈을 빌려 관련 주식을 샀다. 실제로 그 회사는 엄청난 액수의 이익배당금을 주주들에게 돌려주었다. 스물다섯이 되었을 때 카네기는 이 투자로만 연간 수입이 5천만 달러나 되었다.
어느 날 철로 위에 있던 나무다리가 불타서 며칠간 교통이 두절되었다. 당시 그는 구역 감독으로서 나무다리가 불타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마침 그 무렵 철제 교량이 막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돈을 빌려 회사를 차려서 철제 교량을 짓는 일을 시작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너무나 큰 수입이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서부 펜실베니아의 한 가운데 있는 농장을 하나 샀는데, 1년 만에 한 해 100만 달러를 벌었다. 그는 스물일곱 살이 되었을 때 1주일에 천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15년 전에는 하루 종일 일해서 고작 20센트를 버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1862년 링컨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 남북전쟁이 일어나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대규모 사건들이 발생했다. 철로가 대륙을 가로질러 건설됨에 따라 미국은 전성시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자 카네기의 강철 공장도 번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조력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그들을 북돋워 자신에게 수백만 달러를 쌓이도록 했다.
그는 교회의 신도도 아니었으면서도 여러 교회에 7천대의 파이프 오르간을 기증했는데, 총 기부액수는 3억 6,500만 달러였다. 즉 1년 동안 매일 100만 달러씩 기부한 액수였다. 여러 신문들은 엄청난 소유 재산을 가장 잘 기부할 수 있는 방법을 그에게 알려주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공모전을 열었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라고 공언했던 데일 카네기다운 삶의 모습이었다.
데일 카네기 <데일 카네기 1% 성공습관>
'글로벌 리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 패코철강의 백영중(80세) 회장 (0) | 2010.05.19 |
---|---|
총명함과 지혜의 차이 (0) | 2010.01.26 |
세계경제 3국 체제의 서막 (0) | 2009.10.05 |
21세기 리더십의 요건: 지속적인 노력 (0) | 2009.09.30 |
이순신의 독창성 (0) | 2009.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