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자신감을 가져라: 김태연 회장

부산갈매기88 2009. 4. 9. 19:00

경상도에 아들을 간절히 바라던 집안에 정월 초하루 제사 직전에 태어난 계집아이가 있었다. 제사를 미룬 채 손자를 기다리던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머니는 밥을 굶겨 죽이려고 일부러 젖을 물리지 않았다.

 

그 여자아이는 ‘추한 년’, ‘못 생긴 년’, ‘나쁜 년’이라는 수많은 욕을 들으며 자랐다. 아버지로부터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손찌검을 당하는 날도 많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힘들 때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니 차라리 같이 양잿물을 마시고 죽자.”라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술 취한 아버지가 그녀를 심하게 때리자 남동생이 흥분하여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을 한 것이다. 남동생은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녀는 그 충격에 벗어나기 위해 1968년 도망치듯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미국에 건너온 지 2년 되던 해, 그녀는 미국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시집 식구와 함께 산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다. 인종에 대한 편견이 있는 시어머니와 두 명의 시누이는 드러내놓고 그녀에게 폭언을 일삼고 구박했다. 힘든 시집살이로 인해 그녀는 두 번이나 유산을 했다.

 

그녀는 “나는 그곳에서 강아지보다도 못한 존재였다.”고 했다. 시집과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분가도 해봤지만 그녀는 결국 결혼 10년 만인 1980년 이혼했다. 이미 부부사이의 애정이 싸늘하게 식은 데다 남편이 술주정하면서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 그녀는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혼 뒤 그녀는 일곱 살 때부터 꾸준히 배워 온 태권도 실력을 바탕으로 미국에 ‘정수원’이라는 태권도장을 세웠다. 그리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양자로 삼아 6남 3녀의 자녀를 둔 어머니가 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PC가 개발되면서 관련 업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다가 반도체 장비 회사 ‘라이트하우스’를 창업했다. 그녀는 미국 사회에서 맨몸으로 ‘실리콘 밸리의 신화’를 쓴 여성으로 유명해졌다. 그녀가 바로 TYK그룹 김태연 회장이다.

 

“그 남자도 할 수 있고, 그 여자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왜 나라고 안 되겠는가?(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절대긍정으로 산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