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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시 나의 인생] 3대째 이발사 이남열의 만리재

부산갈매기88 2010. 11. 25. 15:56

만리재 고개 복숭아밭은 사라졌지만, 83년째 문 여는 이발소 하나
외할아버지가 물려준 이발소… 지금은 외손자가 가위질
200년 된 초가집 지붕 고쳐 살며 대한민국 최고 이발사 꿈꾼다

복숭아밭 한가운데에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200년도 더 된 옛이야기다. 복숭아밭은 고개 너머에 있었다. 세종 때 학자 최만리가 살았다고 해서 고개 이름은 만리재다. 서울 만리동에서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정월 보름이면 재 너머 사람들과 재 안쪽 아현 사람들이 석전(石戰)을 벌였다. 돌과 몽둥이를 들고 싸워대는데, 재 너머 사람들이 이기면 경기도에 풍년이 들고 안쪽 사람들이 이기면 팔도(八道)에 풍년이 들었다고 했다. 재 너머 사람들도 팔도 풍년을 바라는 터라, 대개는 재 안쪽 사람들이 이기곤 했다.

일제 때 그 초가집에는 이발사가 살았다. 이름은 서재덕. 조선인 가운데 이발사 면허증을 두 번째로 받은 사람이었다. 지금 숙명여대 앞에 열었던 이발관이 잘되자, 서재덕은 1927년 이곳 초가집을 사들여 두 번째 이발소를 열었다.

그에게 조수가 있었는데, 그가 마음에 들었던지라 이발사는 조수 이성순을 사위로 맞고서 이발소를 물려줬다. 이성순은 장인어른에 이어 2대 이발사가 되어서 초가집에 터를 잡아 자식들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해방이 되고, 용산에 미군이 들어오면서 이발소는 크게 돈을 벌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burbuck@chosun.com

그런데 전쟁이 터지더니 빨간 완장 찬 좌익들이 몰려와 ‘미군 머리 깎아주는’ 반동 이발사를 인민재판에 올려대는 것이었다. 두 번이나 벌어진 재판에 질려, 이발사는 가게를 팔아버리고 미군부대를 떠돌았다. 언제 총 맞고 죽을지 모를 병사들은 머리 곱게 다듬고서 팁을 듬뿍듬뿍 줬다. 전쟁이 끝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좌익들이 사라지자 이발사는 번 돈 다 부어서 가게를 회수했다.

초가집은 그대로였으되, 주변은 많이도 변했다. 1955년 가게 건너편에 배문고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전후 상처입은 백성들이 고갯마루에 정주하면서 초가집 주변 복사꽃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마침내 초가집 지붕 한쪽이 내려앉았다. 이발사 가족은 집을 새로 짓는 대신에 초가 위에 슬레이트를 얹고선 공사를 끝냈다. 그래서 지금도 슬레이트 밑에는 볏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기둥들도 여전하다.

1965년, 전쟁 직전에 태어난 이성순의 아들 이남열이 이발관을 물려받았다. 초가집 그대로, 아버지가 쓰던 연장 그대로. 3대 이발사 이남열이 물려받은 성우이용원은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변한 만리고개를 지키며 83년째 문을 열고 있다.

배문고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니, 남루한 이발소가 담벼락에 붙어 있다. 연탄재 네댓 개가 포개져 있는 계단 위로 색 바랜 나무문이 열려 있다. 깨진 유리창을 셀로판테이프로 막아 놓은 문 오른편에 삼색 이발소 표시등이 돌아간다. 들어가 보니, 네 평 남짓한 내부에 전동의자가 세 개, 타일 붙인 욕조와 세면대, 물 데우는 연탄난로가 앉아 있다.
이발사가 노인 한 분을 눕혀놓고 목덜미와 얼굴, 이마를 면도하는 데 꺼내는 면도칼이 세 개다. 이발소 안은 칼 소리와 이발사의 숨소리,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중학교 졸업하고 아버지한테서 기술을 배웠다. 그런데 정작 주인이 되고 나니까 일하기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팔도를 떠돌았다. 마을 이발소에서 세수하고 일 도우면서 기술을 자랑했다. 산골 가서 어른들 머리도 깎아주고 밥도 얻어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 공부해보니까, 그저 손님들 머리 잘 깎아주고 만족하게 해주면 그게 제대로 사는 거겠구나 싶더라”는 것이다. 이발사는 이발소로 돌아왔다. “기왕 하는 거, 이발 기술에 관한 한 대한민국 최고가 되겠다”고 작심하고 다시 기술을 배웠다. 그가 말했다. “30년 지나니까 면도기랑 가위 ‘날’이 뭔지 알겠더라. 지금은 그 연장 가는 법 좀 배운 거 같다.”

IMF는 그에게 큰 기회였다. “중산층이 사라지지 않았나. 그때 중산층들, 무조건 시설 좋은 데 가서 돈 뿌리고 살았는데, 나라가 망한 거지. 그래도 머리는 깎아야지? 그래서 난 웃었지.” 좁은 골목길에 사람들 줄 세워놓고 윗머리치기, 중간머리치기, 숱치기, 마무리치기를 할 때마다 각각 가위랑 빗을 따로 꺼내 느릿느릿 돈을 벌었는데, 나중에 계산해보니 1억원이 넘더라고 했다.

그 돈으로 아들 대학 보내고, 집도 한 채 샀다. 그러고는 이발소는 여전히 시장통 옛 초가집을 지킨다. 지금은 이름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사장, 회장들이 순서 기다리며 앉아 있다가 머리를 깎고 간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돈 욕심은 없다. 그런데 진짜 대한민국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은 굉장히 크다.” 그래서 예약도, 에누리도, 새치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왜? 대한민국 최고니까. 탐욕/그리고 무딘 삶을/깎아내는/이발사의 시퍼런/舌劍(시인 김영환, ‘성우이용원’ 중에서) 지금도 이발사는 만리재에서 하루 딱 열명씩 손님을 받으며 칼을 놀린다. 3대 83년째.

 

  • 박종인 엔터테인먼트 부장 sen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