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호치민

부산갈매기88 2009. 2. 20. 09:13

호치민(Ho Chi Minh : 1890~1969)은 ‘베트남의 혼’,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최고의 인물이다. 그는 전혀 투사 같지 않은 호리호리한 외모에 온화한 성격을 지닌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한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민중봉기가 한창인 19세기 말, 중부 베트남의 게친주(州)에서 태어나 유학자이며 하급관리 출신인 아버지에게 자유와 독립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났다.

 

1911년, 청년이 된 호치민은 ‘프랑스를 이기기 위해서는 프랑스를 알아야 한다’고 결심하고 프랑스로 떠난다. 그는 구엔아이(애국자 구엔)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해방운동에 참가, 혁명지도자로 성장했고,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열린 베르사유회의에 베트남대표로 출석해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함으로서 일약 베트남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 후 그는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고, 유럽과 중국, 소련 등지에서 조국 해방을 위한 투쟁에 매진한다.

 

1941년, 호치민은 30년이라는 길고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카오방 지역의 북서부에 있는 거대한 석회암 지대를 통해 다시금 조국의 땅을 밟았다. 거의 1세기 동안 베트남을 지배해온 강력한 프랑스에 의해서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전멸된 상태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그의 손에는 등나무로 만든 여행가방과 타자기만이 들려 있었다.

 

그는 물질적 기반도 없고 주위 인물들도 몇 명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직접 타자기로 만든 팜플렛과 신문을 대량 복사해서 끈질긴 조직 활동과 정치교육을 통해 마을에서 마을로 주민을 포섭해 나갔다. 그때부터 호치민은 이름을 50번씩이나 바꿔 가면서 사람들을 경악시킬 만큼 엄청난 통찰력과 믿기지 않는 정세판단력으로 ‘호 아저씨’의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베트남은 프랑스, 일본, 미국의 각축장으로 변해서 독립의 전망은 더욱 불투명해졌으나 그는 신출귀몰한 게릴라전과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며 프랑스, 일본, 미국을 상대로 싸웠다.

 

그는 적들 사이의 모순 관계를 이용해서 비밀전략과 기만전술을 구사하면서 적을 혼란에 빠트렸다. 드디어 호치민은 자신이 직접 고안해낸 새로운 전투 수행방식으로 1953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직접 지휘해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프랑스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공산화의 도미노를 우려한 미국이 베트남의 통일을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국은 히로시마 원폭의 450배나 되는 1300만 톤의 폭탄을 쏟아 부으며 베트남 전토를 초토화 해나갔다.

 

그러나 호치민을 따르는 베트남 사람들은 악바리 같았다. 통킹 만 전투의 경우, 미군의 폭격으로 남부와 북부의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기근이 덮쳐 수백만의 희생자가 났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의 지시라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그를 따랐다. 그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계속해서 죽음을 감내하며 전쟁에 임했고, 베트남은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의 승리를 좌우하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사람의 정신과 의지’라는 것을 호치민은 가르쳐 준 것이다.

 

그는 지금도 국민들에게 ‘호 아저씨’라고 불리며 노인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1969년 그는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그를 베트남의 혼을 심어 준 사람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았다.

 

<중소기업뉴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