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일이

"女제자와 바람나 해외로 도피한 음악가, 돌연 귀국해서…"

부산갈매기88 2011. 8. 3. 15:05

1936년 4월 3일자 조선일보 3면에는 '금단의 과실을 딴' 안기영·김현순 양인의 '눈물로 반죽한' 고백기(告白記)가 조광(朝光) 4월호에 실린다고 예고했다. 이 지면은 조선일보 출판부가 발행하는 '조광'과 '여성(女性)'의 전면광고란이었다.

이화여전 음악교수인 안기영(安基永)은 제자인 소프라노 김현순(金顯順)과 함께 1933년 봄, '사랑의 오아시스'를 찾아 해외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다. 두 사람의 사련(邪戀)은 당시 큰 화제였다. '한 번 스테이지에 오르면 여러 남녀의 혼백을 미치게 하던 조선 악단의 명성'이었던 테너 가수 안의 인기뿐 아니라, 현순도 촉망받는 젊은 음악도로 조선일보에 소개(1933년 3월 1일자) 될 정도로 지면에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사랑의 순례를 떠난 두 사람의 목적지는… 동양의 국제적 도시, '로만쓰의 도시' 상해에서 최후의 항구를 발견하였다"며, 두 사람의 도피 근황을 전하기도 했다.(1933년 7월 19일자)

1936년 4월 12일자 2면에 실린 '노래일흔 카나리아 안기영·김현순' 시리즈 첫회 기사.

그런데 그들이 근 4년 만에 딸을 낳아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귀국 독창회'도 열겠다고 신고했다. 도피행각 전 안기영은 신여성 아내와 1남 2녀를 둔 가장이었다. 그럼에도 제자와 바람이 나 처자를 내팽개쳤다. 그런 두 사람의 독창회 개최 소식에 이화여전과 기독교단을 필두로 장안의 여론이 들끓었다. 경찰은 이들을 의식해 "보안상 자미업다"며 하루 전에 '공연 불가'를 통보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일보는 '노래 잃은 카나리아, 안기영·김현순' 스토리를 4월 12일자부터 4차례 연속 보도했다. 첫회부터 '무대에서 실격된 도색가인(桃色歌人)'이라는 제목을 붙여, 안기영을 '도색한'으로 단정했다. 아울러 13일자 사설 '도덕의 퇴폐'를 통해, 금일의 조선에서 도덕이 퇴폐한 단적인 예로 안기영의 케이스인 '자기가 가르치든 여생도를 유인하야 고비원주(高飛遠走/멀리 달아나 종적을 감춤)한 자'를 적시하고 비판했다.

시리즈 기사에 따르면, 안기영과 그 첫 아내 이성규(李聖圭)는 배재와 숙명에 다닐 때 만나, 열렬한 러브레터를 교환하다 6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는 잡지 '별건곤'에 "부부의 굿고 아름다운 로맨쓰"로 소개될 정도였고, "영원히 변치 않을 애정"으로 축복받았다. 결혼 후 안기영은
미국 유학을 떠났고, 아내는 교편을 잡아 그의 유학 빚을 갚아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류머티즘에 걸려 눕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데 금의환향한 안기영은 나이 어린 제자 현순과 사랑에 눈이 멀었다.

안기영이 '사랑과 예술을 찾아' 단행한 도피의 끝은 고단했다. 무대에 설 때마다 '기사가 됐던' 안기영의 동정은 이후 조선일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안기영은 민요연구와 향토가극(鄕土歌劇)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병든 아내를 버렸다'는 비난 속에 묻혀 살다 6·25 전쟁 때 월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