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그리스 문명의 절정을 이끈 ‘지상의 제우스’: 페리클레스

부산갈매기88 2009. 6. 4. 08:38

그리스 문명이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던 시기는 페리클레스(Perikles : BC 495?~BC 429)가 아테네를 영도하던 시대다.

 

이 시기에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아낙사고라스, 플라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살았고,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한 고대 그리스 문명의 절정을 이룬 ‘황금시대’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잘생긴 젊은이로 출생과 교육에서 강력한 잇점을 지닌, 말하자면 완벽한 조건을 지닌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비록 귀족출신이었지만 소수의 귀족들이 벌이고 있는 낡은 족벌정치를 싫어했다. 많은 땅을 소유한 귀족 계층이 상업의 발전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는 차츰 세력이 커지던 일반 자유민의 편에 섰다. 페리클레스는 뛰어난 웅변술로 평민들을 끌어들였다.

 

“이곳 아테네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시민으로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됩니다.”

 

그의 웅변을 듣은 민중들은 페리클레스를 지지하기 시작했고 그는 귀족세력의 거점인 아레오스파고스(정무회)를 장악해나갔다. 그는 아레오파고스회의의 정치적 실권을 박탈하고 민회와 민중재판소의 권한을 강화시켰으며, 관리를 희망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출하는 등 민주정치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 결과 제3신분에 있던 자들도 최고관리인 아르콘에 취임할 수 있게 됐다.

 

그 후 30년간, 그는 아테네를 영도하면서 그리스 민주주의와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페리클레스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일으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공공사업과 방위 전략과 문화적 사업을 동시에 벌였다.

 

가령 아테네와 피레에프 항구 사이에 긴 성벽을 구축했는데, 그것은 적군이 바다를 통해서만 아테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방위태세를 개선한 사업이었다. 페리클레스는 뛰어난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전략가였다.

 

그는 해륙 양면에서 아홉 차례의 승리를 거뒀는데 이 승리를 담보로 페리클레스는 아시아의 강국 페르시아와 등거리 외교전을 펼치고, 스파르타와도 30년간의 화약을 맺는 한편, 이때부터 동맹의 여러 도시들을 모두 아테네의 속국(屬國)으로 삼고, 아테네는 제국(帝國)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정권의 안정을 이룬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파괴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한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 거대한 사업을 위해서 그리스 동맹군인 델로스 동맹 기금을 아테네로 옮겼고 그 자금으로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유물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고대의 성소를 재건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다른 도시국가에서 억압받던 예술가들이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그는 국내외에서 많은 학자·예술가들을 고용해 아테네를 그리스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미켈란젤로 이전에 아무도 그와 견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세운 파르테논 신전이다.

 

사람들이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비가 과도하게 지출되고 있다고 비난하자 그는 그 신전을 자신의 개인 돈을 들여서 건축하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청렴결백하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권좌에 있던 그 오랫동안 한 치의 오점도 남기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페리클레스는 죽을 때까지 매년(만년의 극히 단기간 제외) 스토라테고스(장군직)에 선출돼 ‘지상의 제우스’라 불리게 됐고, 이때가 아테네의 최성기였다.

 

 

<중소기업뉴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