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최고의 CEO 세종대왕

부산갈매기88 2009. 6. 9. 08:28

세종은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몇 손가락 안의 훌륭한 군주이다. 1418년 8월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32년간 국가를 경영하면서 조선 왕국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역대 군주 중 가장 뛰어난 CEO였다.

 

세종실록을 보면 청백리의 표상으로 여겨왔던 황희 정승이 사실은 스캔들과 부패의 인물로, 조정에서 추방해야 할 대표적인 인물로 사간원의 공격대상이 되어 왔다.

 

“황희는 권력을 잡은 여려 해 동안 매관매직을 했다.”

 

“자기 사위의 살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나라의 문서를 변조하고 사건 심리를 수개월이나 미루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황희는 세종의 왕의 계승에 적극 반대해 귀양까지 가는 세종의 적대 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 황희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나라의 질서가 바로 서야 한다며 장자인 양녕대군을 왕위에 앉히려다 유배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황희를 말없이 껴안았다. 그 결과 황희는 세종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세종은 귀천을 불문하고 인재를 볼 줄 아는 눈을 갖고 있었는데, 그 눈을 제공한 이가 황희였다. 황희도 결점이 많았으나 세종과 일하면서 점점 세종을 닮아가게 되었고, 말년에는 가장 훌륭한 청백리의 표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세종은 사람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일을 시켰다. 세종의 인재 등용정책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관노 출신의 인재를 등용한 것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장영실이다.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어느 날 세종은 관노출신의 장영실을 등용하겠다고 밝혔다. 조정신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관노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은 불가하다면 왕명을 거두어달라고 상소를 올려댔다. 세종의 등극 초기에는 아직 훈구대신들이 많았던 관계로 왕이라 해도 자신의 뜻대로 정책을 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장영실에게 종6품의 벼슬을 내렸다.

 

장영실은 세종의 은총에 힘입어 혼천의(천체 관측기구),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수표(하천 수위 측정기), 측우기 등 수많은 과학 장비들을 발명해내는 개가를 올렸다.

 

세종의 인재등용 원칙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무노동 무임금 정책이었다. 그는 실력 있는 사람을 중용하되 중신들의 텃새나 공짜 밥을 먹고 있는 무리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당연히 저항이 적지 않았으나 세종은 굴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에 따라 세종 32년 재위 기간 중에는 적어도 중신들의 이권추구나 권력 개입이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세종은 나라의 힘을 키워야 적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4군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으며, 한글 제정, 아악 정리, 활자 주조 등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창달하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한 최고의 경영자이자 군주였다.

 

 

박기현 <천하를 경영하는 리더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