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지역에 한자(漢字)를 쓰는 부족과 문자가 없는 부족이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에 사람처럼 서서 걸어 다니는 온 몸에 털이 수북하게 난 원숭이가 나타났다. 문자가 없는 부족은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잔나비'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한자를 쓰는 부족은 '비슷하다'(類) '사람'(人) '원숭이'(猿)라는 각각의 단어를 조합해 '類人猿'이라고 이름 지었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세종이 만든 한글 덕분에 우리 말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갖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한글의 우수성만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한글전용을 마치 애국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배타적인 사고가 지배해 지난 수천 년 우리 문자 역할을 대신해 준 한자를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한자어(漢字語)를 한글로 바꾸어 쓰는 것이 한글 전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글로 쓴 '유인원'은 단지 한자로 된 '類人猿'을 읽는 소리일 뿐이고, 그 자체로는 뜻을 유추해 볼 길이 없다. 그런데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글로 유인원이라 써야 되고, 그 모태가 된 한자어 '類人猿'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베트남에서는 감사하다는 말을 '깜언'(cam-on)이라고 한다. 이 말은 한자어 감은(感恩)에서 온 것이다. 과거 한자문화권에 속했던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전통문화를 단절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한자를 폐기하고 로마자로 표기하게 되었다. 베트남어의 수많은 어휘가 모두 한자어에서 온 것인데, 지금 베트남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 채 소리 나는 대로 쓰고 뜻을 익히고 있다. 우리도 한글 전용을 계속한다면 먼 훗날 베트남인들처럼 어원도 모른 채 단순히 음과 뜻을 주입식, 암기식으로 익히게 될 것이다.
양말은 무슨 뜻일까. 양말은 한자로 '洋襪'이다. 이 물건이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그 명칭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다가 '서양에서 들어온 버선'이라고 뜻을 정하고 한자어로 양말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또 비행기를 타면 의자 앞에 "구명 동의는 중앙 팔걸이 밑에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보게 된다. 몸통 동(胴), 옷 의(衣)를 써서 '胴衣'라 하는데, 소매가 없는 '몸통에 입는 옷' 즉 '조끼'란 뜻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싫든 좋든 한자문화권에서 살아왔으며 우리 어휘의 대부분이 한자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명학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잡학 만물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모님 편찮은 경우에는 씀씀이에 대해서 미리 챙겨라 (0) | 2012.02.08 |
---|---|
이상하게 죽은 사람들 (0) | 2012.01.25 |
독재자의 사망 뉴스 (0) | 2011.12.20 |
길에서 멧돼지 만나면 우산 펼쳐라? (0) | 2011.12.19 |
이를 갈 때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0) | 2011.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