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비즈니스

35세에 보일러공…43세에 창구 직원…53세에 지점장까지

부산갈매기88 2012. 7. 13. 12:58

 

[企銀 신당동 지점 이철희 지점장의 '인생 드라마']
임원車 몰다 보일러공으로… 야간대서 금융자격증 9개 따 43살에 20년 만에 창구 직원
부지점장때도 2시간 일찍 출근, 보일러 관리하며 하루 시작
"내가 열심히 해야 나 같은 사람 많이 나오지요"

'공장 근로자→건설 노무자→운전기사→보일러공→은행 창구 직원→지점장'. 12일 기업은행 지점장이 된 이철희(53)씨의 파노라마 같은 인생 역정이다.

"하나를 이루고 나니까 다른 꿈을 꾸게 되더군요."

축하 인사를 건네자 180㎝ 키가 껑충한 이씨가 멋쩍게 웃었다. 전남 영암 출신인 그는 1974년 중학교를 졸업한 뒤 무작정 상경했다.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하고 아파트 공사판에서 등짐을 지면서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맘먹었다. 점심시간을 활용해 운전 학원을 다녔다.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1983년. 기업은행에 운전기사로 취업했다. 당시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마크파이브 승용차로 임원들을 모셨다. 당시 월급은 15만원. 그는 "운전 일을 7년간 하면서 공사판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양복 입은 은행원들을 모시면서 항상 부러운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 말했다.

12일 기업은행 신당동 지점장으로 승진한 이철희씨가 성동지점 건물 지하에서 과거 본인이 매일 손질했던 보일러를 어루만지고 있다. 그는 1990년대 이곳에서 8년간 보일러공으로 일했다. 그는 올해 초 성동지점 부지점장이 된 뒤에도 아침 7시에 출근해 보일러 점검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성형주 기자 foru82@chosun.com

평생 운전만 할 순 없을 것 같아 열(熱)관리 자격증을 땄다. 운전대를 놓은 뒤 은행 성동지점에서 8년간 보일러공으로 일했다. 매일 보는 은행원들이 부러워 자청해서 지점 잡무를 도왔다.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야간 전문대도 다녔다. 선물 거래 상담사, 금융 자산 관리사 같은 금융 관련 자격증 9개를 따고, 어깨너머로 은행 업무를 익혔다. '오늘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 대신 '오늘 하나라도 이루고 살자'는 맘이었다.

마흔세 살이던 2002년, 행운의 여신이 또 손짓했다. 금융 자격증을 많이 딴 그에게 상사들이 은행 업무를 맡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어음 교환이나 서무 일을 시켰는데 일 처리를 야무지게 하자 상사들은 그를 창구 직원으로 발령해 달라고 본점에 건의했다. 은행 밥을 먹은 지 20년 만이다. 그는 진짜 은행원이 됐다는 생각 때문에 잠을 못 잤다.

그는 "나이 든 사람이 은행원으로 창구에 앉아 있으면서 살갑게 말을 붙이니까 손님들이 더 좋아하더라"고 말했다. 작년엔 아파트 담보대출을 해 준 기업의 간부가 회사의 자금 거래를 몽땅 이씨에게 몰아줬다. 이씨의 '노익장'에 감탄해서다. 덕분에 다른 은행에 입금돼 있었던 500억원 정도의 예금을 새로 유치했다.

이씨는 지난 1월 부지점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6개월 만에 다시 지점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파격적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승진하면서도 보일러공 일은 본인이 직접 했다. 은행 문이 열리기 2시간 전에 출근해 보일러를 관리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뭘 그런 일을 하느냐"는 말도 들었다. 그는 "내가 열심히 해야 앞으로도 나 같은 사람이 많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12일 기업은행은 전체 직원의 13%인 1600명을 인사 발령했다. 이 중에는 이씨 못지않은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여럿 있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조준희 행장의 인사 원칙이 반영된 것이다.

이날 과장으로 승진한 등촌역 지점의 김용술(50)씨는 청원 경찰 출신이다. 26년 전 은행에 들어온 그는 38구경 권총을 차고 현금 수송을 돕고 건물 경비를 섰다. 2007년 정규직 창구 직원이 됐고, 남다른 친화력으로 5년 동안 신규 고객 4987명을 유치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하루 3명씩 새로운 손님을 모시고 오는데 승진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계약직 여직원이었던 한채성(30)씨는 이날 정규직이 됐다. 5년 전 국문과를 졸업해 도서관 사서가 될 준비를 하려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곳이 기업은행이었다. 가스총과 곤봉을 차고 대기표를 뽑아 주는 용역 경비원이었다. 지점 선배 직원들의 잡일을 돕다 계약직 창구 직원으로 시험을 쳐서 들어왔다. 그에게 정규직이 된 비결을 물었다. "어머니·아버지한테 설명하듯 사장님·사모님들한테 설명하면 금세 내 팬이 된다"고 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