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부산갈매기의 섬 산행: 여수 금오도 대부산-비렁길 2코스 산행기

부산갈매기88 2013. 4. 23. 17:32

*산행일시: 2013. 4. 20(토). 이슬비

*참석자: 부산백산산악회원 및 게스트 포함 43명(백산남친, 바람숙, 운해, 와니, 붉은노을, 숙이, 형제, 부용, 여니야, 금호지 부부, 갈바람, 장동근, 휘운 모녀, 혜영, 푸른산, 산바람, 김경희, 산들바람, 김화영, 은수, 와석, 해월정, 김상규, 노홍철, 천재, 시골사람 부부, 성길, 해곤, 행복, 신철웅 및 게스트, 봄산, 유유산속, 햇살, 산하, 한사랑, 청림, 부산갈매기)

 

*산행코스: 여수 여천마을(11:30)-대부산(12:55)-정자((13:24)-비렁길 2구간-신선대(14:40)-두포(15:15)-굴등전망대(15:46)-촛대바위(15:56)-직포(16:14)

*산행시간: 4시간 44분(점심시간 30분, 휴식 30분)

 

*산행 tip: 부산에서 몇 십 년 살아온 사람들이라 바다는 그렇게 그리웁지 않을 듯 한데, 의외로 바다와 섬이 주는 마력 때문에 많은 백산의 회원님들과 게스트들이 동행을 하였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운해대장님은 섬 산행을 감행하기로 했다. 운해님의 도술로 비구름을 몰아내어버리겠노라고 말이다.

 

금오도는 자라와 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조선시대 궁궐을 짓거나 보수를 할 때, 그리고 임금의 관을 짜거나 전함의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었는데 숲이 너무 울창하여 거무스럼하게 보였다 하여 거무섬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금오도는 최근 이몀박 대통령이 여름 휴가지로 추천을 하면서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금오도는 여수 돌산의 신기마을 선착장에서 금오도 여천 선착장까지 페리를 타고 30분 정도 가야 한다. 배를 탄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바다로의 도전이다. 배가 앞으로 달려갈 때 배 뒤에서 남기는 하얀 거품은 오만 가지 상상에 젖게 한다. 그리고 그 하얀 포말이 우리의 눈에 언어가 되어 되돌아 올 때 마음에 감동이 인다. 갈매기도 배 뒤를 따라 훠이훠이 날개짓을 한다. 배 뒤에 매달린 태극기는 자신의 몸을 펄럭이며 살아 있노라 외쳐댄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싸늘한 바람마저 볼때기를 때려서 뱃전에 기대어 서서 갈 수가 없다. 그래서 3층의 선실로 들어간다. 모두 엉덩이를 선실 바닥에 뭉기적거려 본다. 너무나 선실 방바닥이 따스하기에.

 

선실 3층은 엔진의 소리에 쿵덕거리는가 싶더니 좌우로 조금 흔들린다. 오랜만에 선실 바닥에 앉아 본다. 가끔 중국이나 일본에 페리호를 타고 가던 일 말고, 배 선실에 앉아 본 일이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배 안에서 잠시 웃음 한 보따리를 풀었는가 싶더니 배의 엔진이 조용해진다. 그리고 배가 선착장에 부딪히는 소리가 ‘쿵’하며 몸이 떨리는가 싶더니 사람들은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주섬주섬 챙긴다고 분주하다.

 

배가 도착하자마자 선수의 데크가 육지와 연결되니 자동차부터 달려가기 시작했다. 선착장 여기저기에 15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다른 산악회원들과 뒤엉켜 소란스럽다. 틈틈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보이고, 배낭을 추스르는 사람도 있다. 비는 오는 것도 아니고 안 오는 것도 아니고 시집갈 신부 가슴만 멍들게 하는 그런 날씨다. 일행들의 단체 인증샷이 선착장 광장에서 있었다. 화장실에 간 사람들도 많건만 그 사람들이 다 오기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는 거 같았다.

 

산행은 선착장에서 150여 미터를 산길로 올라간 갈림길에서 또 100여 미터 왼쪽으로 가니 들머리가 나타났다. 초입이 어느 지점에서 시작되는지 운해대장님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다행히 바로 초입을 찾았는지 오라고 일행에게 손짓을 한다. 초입부터 등산로는 너덜길이라 예사롭지가 않았다. 우측 대각선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고도를 높여 갔는데, 능선이 가까워질수록 25분간 치고 올라가는 길이 만만찮았다. 가파른 비탈길이 계속 이어짐에 체력이 부치는 여자 회원들은 옆으로 비껴서거나 뒤로 쳐졌다.

 

능선에 올라서니 등산 안내도가 나타났다. 일행들은 잠시 몸을 추스르고 갈 방향을 알아보기 위해 능선 쉼터의 탁자 위에 배낭을 내려놓고 등산 안내판을 들여다보았다. 일행들은 비옷도 챙겨 입어보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우산을 쓰고 산행을 했다. 안개가 자욱한 탓에 3~4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쉼터에서 우측의 능선을 따라 갔다. 길은 그런대로 완만해서 올라 올 때의 힘들었던 것을 다소 보상해 주었다. 안개와 짐 꾸리는 문제로 사람들은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다. 내 뒤에는 햇살님과 산하님이 배낭을 다시 꾸려 본다고 산길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안개속에서 등산로를 따라가니 너른 바위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돌탑이 나타났다. 그 안개속의 돌탑을 배경으로 봄산님 부부, 햇살님 부부, 갈바람님과 해월정님, 혜영님이 하나 둘씩 짝을 지어 사진을 찍어 보았다. 안개가 너무나 짙어서 2미터 이상 물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섬이 수억 년의 세월을 버텨 온 토대는 바위였다. 깎이고 씻기고 흘러내려도 지금의 모습을 유지케 한 것은 바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금오도 능선은 암릉이 많았다. 암릉이 다소 단차를 두면서 나타난 곳이 문바위였다. 그곳은 초입에서 45분 거리였고, 능선의 등산 안내판에서 20분 거리에 있었다. 아주 가는 이슬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에 여자 회원들은 분위기에 도취되는 듯 했다. 안개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에게 더 감동을 주기에. 문바위를 배경으로 회장님, 갈바람님, 해월정님, 와석님, 유유산속님이 무리지어 추억의 한 페이지를 남겼다. 또 와니님, 봄산님, 은수님, 산들바람님, 혜영님이 문바위와 꽃 앞에서 웃음꽃을 피워 보았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주위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도 추억에 남겠지만, 안개속에서 어깨를 맞대고 함께 한 시간이 오랜 기억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어쩌면 안개와도 같기에.

 

대부산(374m) 정상까지의 능선은 암릉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이슬비에 젖은 바위가 미끄러울까봐 조심했다. 안개 때문에 일행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대부산의 표지석은 보통 돌로 정상석을 만들어 놓는데 여기는 스텐레스로 만든 이정표로 해 두었다. 그래서 산꾼들은 ‘여기가 정상인가?’하고 의구심을 가지게 하였다. 다행히 갈바람님과 같이 걷고 있었기에 그 표지판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겼다. 이어서 해월정님, 봄산님과 유유산속님 부부, 은수님들이 뒤따라오기에 한 컷씩 찍었다. 이제 그 정상에서 하산길은 조금 내려서는 암릉이었다.

짙은 안개로 여전히 동서분간이 힘든 상황이었다. 암릉은 가파르지고 비에 젖어 있어 내려가기가 엄청 힘들었다. 갈바람님이 앞서 가다가 도저히 무리라고 뒤쪽의 일행에게 우회로로 내려 오라고 외쳤다. 갈바람님과 해월정님이 먼저 경사진 바위 아래로 내려가고 나는 해월정님의 도움으로 암벽을 겨우 내려섰다. 조금 산길을 내려가니 안개가 일순간 걷히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갈바람님과 해월정이 두포만을 배경으로 한 컷을 했다.

 

산길은 이제 부엽토로 되어 있고, 식사할만한 자리도 있어 갈바람님이 여기가 좋을 듯 하다고 생각해서 망설이고 있는데 운해님이 조금더 가면 정자에서 앞서 간 일행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정자까지는 너덜길에 오르막길이었다. 밥 때가 지난 1시가 넘은 시각이라 오르막길은 힘이 들었다. 산 봉우리에서 일행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자 바닥에서 일행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고, 노홍철님은 우의를 뒤집어쓰고 피난민처럼 라면을 끓이고 있었고, 정자 옆에서는 청림님이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모두 피난민처럼 일부 일행은 바람을 막으려고 비옷을 입고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후미조가 도착하니 이미 선두조들은 거의 식사를 다 마쳐가는 상태였다. 그래서 먼저 식사를 마친 팀들은 출발을 했다.

 

정자 남쪽 아래에 자리를 잡은 운해님을 비롯한 10여 명은 30분만에 식사를 마치고 비옷을 걸치고 얼른 뒤따라갔다. 하산길은 자갈길이라 신경을 조금 써야 했다. 10여분 내려가니 너덜지대에서 와니님이 다래 새순을 뜯는다고 길가 숲에서 지정거리고 있었다. 이제 함구미로 내려가는 비렁길 1구간과 신선대로 빠지는 비렁길 갈림길에서 버스시간 때문에 신선대로 내려갔다. 신선대로 가는 길은 시야가 트였고, 샤방샤방 걷기도 수월해서 콧노래가 나올만한 코스였다. 생고생을 하며 걷던 길이 너무나 평온하고 안락한 코스라 일행들도 어깨춤이 나는 듯 했다.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신선대였다. 이름으로 보아서 신선들이 노닐다 갔다는 의미 같았다. 1코스의 미역널방 방향의 절벽이 훤히 건너다보이며 멋지게 전개되고 있었다. 시간이 있었더라면 함구미로 해서 미역널방으로 돌아왔겠지만, 한정된 시간이라 아쉬움을 남겼다. 어디 인생이 후회없는 인생이 있겠는가. 아쉬움 남지 않은 인생이 있겠느냐 말이다. 단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바른 길이라 착각하며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거늘. 신선대에는 너른 바위가 펼쳐져 있고, 사방이 트여 있어서 조망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바다를 접하고 사는 부산 사람이지만 색다른 장소에서의 분위기는 또 다른 맛을 냈다. 그래서 금오도는 산행과 여행, 산책을 겸한 환상의 코스였다.

 

신선대 너른 바위 위에서 바다와 절벽을 배경으로 봄산님과 유유산속님, 노홍철님과 아들 천재가 부자의 정을 껴안으며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정표는 무언가? 아버지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재산보다 사랑이 더 큰 것이 아닐까? 그 끈끈한 사랑과 정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휘운님과 따님의 정감어린 대화와 모습 속에서도 모녀의 깊은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이다. 남자가 밖에서 열심히 몸을 던지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이다.

 

이제 신선대에서 두포마을까지 30여 분을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길가에는 쓰러질 듯한 외딴 집이 있었고, 산 대나무들은 터널을 이루고 있어 지나가는 일행에게 머리 위해서 축복을 해 주고 있었다. 두포에 내려서 이곳 함구미를 향해서 걸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허리를 돌아서 가는 길에서 바라보는 두포만의 선착장에 매어 있는 배들은 평화스럽기만 했다. 마을의 집은 제주도에서 보듯 돌로 키보다 높게 쌓여 있었고, 관광버스는 그곳에서 손님을 다 내리고 덩그런히 세워져 있었다. 일행의 발걸음이 느려지니 빨리 오라고 붉은노을님이 소리를 쳤다. 두포마을을 돌아 직포 가기 전의 굴등 전망대로 걸어갔다.

 

두포에서 굴등 전망대 길은 조금 오르막길이라 힘에 부쳤다. 길 가에는 머위 잎들이 더욱 파래져 가고 있었고, 밭에는 방풍나물이 심어져 있었다. 그래서 길 가에는 <산나물 채취금지>라는 팻말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굴등 전망대를 향하여 돌아가노라니 지나온 신선대의 절벽들이 아스라이 보였다. 앞서 가던 일행이 갑자지 소란스러워졌다. 유채밭이 나타났다. 일행들은 노오란 유채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다고 정신이 없었다. 유채꽃이 일행의 가슴에 묻어 있었고, 마음에도 노랗게 수놓아져 있었다. 도회지의 하얀 빌딩에 갇혀 살다가 노오란 유채꽃들의 향연에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되어 있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담에 기대어서 일행들은 포즈를 잡아보기도 했다.

 

유채밭에서 100여 미터 앞에는 굴등전망대가 있었다. 그 마을 어귀에 다른 산악회에서 온 팀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 마을을 지나서 조금 가파른 길을 올랐다. 10여 분 힘들게 올라가니 촛대바위 전망대가 나타났다. 전망대에서 바로 뒤편으로 전개되는 바위가 촛대바위였는데, 누가 봐도 그 바위는 촛대바위라기 보다는 남근바위 같았다. 운해님을 비롯한 일행 10여 명이 어우러져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분주히 포즈를 취해 보았다. 앞쪽으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니 평온하고 평상심을 가져다주고, 왼편으로 보이는 직포마을은 고요함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선착장의 배들을 보니 2~3일 정도 낚싯대를 드리우고 쉬었다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거리고 싶은 생각이 언뜻 스쳐갔다.

 

촛대바위 전망대에서 조금 가니 나무계단이 나오고,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길가의 잘려나간 노송가지들이 인간을 원망도 하지 않은 채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노송을 배경으로 일행은 사진을 찍었다. 길을 덮은 드리워진 소나무 가지가 세월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 직포 마을에는 150여 년 이상이나 되어 보이는 큰 소나무들이 가지가 잘리운 채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일행들은 그 소나무 앞에서도 한 컷씩 해 본다. 마을에는 먼저 온 회장님 이하 10여 명의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체 4시간 40여 분(직포에서 버스 대기시간 30분, 직포~여천마을 버스 승차시간 20분 불포함)의 산행은 끝이 났다. 버스는 주말이라 분주한지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버스 회사와 페리 스케줄에 맞추어 운행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마음 졸이며 안달복달할 일이 아니기에 모두 느긋해졌다. 운해님은 버스 회사에 연락도 해 보고, 선사에 연락도 해서 시간을 알아보았다.

 

일행들은 직포 버스 정류장에서 30분 정도 시간을 보냈다. 다른 산악회에서 온 10여 명의 회원들도 여름 땡볕에 늘어진 엿가락처럼 맥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5시가 넘어서 버스가 왔다. 중형 버스는 오면서 빈 자리를 몇 개 남기지 않고 손님을 싣고 들어왔기에 20여 명의 우리 일행이 타니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었다. 엉겨 붙어서라도 가야 할 상황인지라 버스는 빼곡히 채워져 숨쉬기조차도 만만찮았다. 20여 분을 달려 여천마을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운해님이 선착장에 있는 다른 일행에게 배표를 사두라고 해서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인원 파악이 이루어지고 바로 승선을 했다.

 

페리는 25분 정도 걸려서 처음 출발지인 돌산 신기마을에 도착해서 곧바로 강남고속에 몸을 실었다. 1시간을 달려서 저녁식사를 한다고 했다. 달려간 곳은 뷔페 정식을 먹는 진달래 식당이었다. 둥그런 탁자에 대여섯 명씩 둘러 앉아 저녁 식사를 했다. 네모난 탁자가 일렬로 정렬된 곳이 아니었기에 다소 느극했다. 그리고 뷔페식이었기에 삼삼오오 먹고서 일어섰다.

 

섬에 대한 기대감과 그리움. 안개가 앞을 가리우고, 숨막힐 듯한 바다와 절벽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감동의 쓰나미가 일어났다. 그 노오란 유채꽃밭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황홀감에 빠지고, 인생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잡아 두려고 애쓴 회원들이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산행을 통해서 욕심으로 채워진 모습에서 좀더 물욕이 비워진 여유로움과 넉넉함으로 채워가는 모습이 되기를 소원한다. 세상에 주먹 쥐고 나와서 움켜쥐려고 몸부림치던 삶에서 이제는 뭔가 세상을 향해 배려하고 베푸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결코 그 모든 것을 다 움켜쥐고 떠나가는 인생은 아니기에. 오늘도 멋진 인생 나그네의 섬 산행은 그 마음과 뜻을 다하는 사람과 함께 완성되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금오도가 사람을 받아들이기고 한 것은 불과 130년 전이라고 하니, 아직은 인간의 때가 덜 묻고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섬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마 각 포구까지만 포장이 되어서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섬 산행을 기획하기 위해서 2주 전에 현지답사를 해서 고생을 한 운해대장님에게 모든 공을 돌린다. 그리고 단 1명이라도 게스트를 모시기 위해서 노력한 회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공은 표가 나지 않으나 항상 못한 점은 드러나기가 쉽고, 입에 오르내리기가 쉽다. 그러나 말없이 묵묵히 진행을 맡아 수고해준 회장님과 붉은노을님 이하 여러 운영진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 마음이 있기에 백산은 참 아름답게 성장해 가고 있다. 그대의 마음이 머무르는 곳이 아름다운 백산임을 잊지 말기를....

 

*산행지도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