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식히기

<손짓, 그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 이노미 박사

부산갈매기88 2009. 8. 28. 09:41

<손짓, 그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 이노미 박사

 

우리나라에서 애인을 뜻하는 새끼손가락 세우기는 인도·네팔에선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뜻이다. 그리스인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 칭찬이 아니라 입 닥치고 가만있으란 소리다. 검지를 깨무는 이탈리아인을 조심하라. 매우 화났다는 뜻이니까.

 

문화 간 손짓언어의 의미 차이를 분석한 《손짓, 그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바이북스)를 읽고 나면 "말이 안 통하면 손짓·발짓 하면 되지"라는 말은 못하게 된다. 손짓 하나에 나라마다 얼마나 다른 생각들을 하는지, 이노미(48) 성균관대 비교문화학 박사는 다양한 예를 통해 설명한다. 이씨가 비교문화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부터가 그렇다. 그는 1992년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50개국을 돌아다니며 여행작가로 활동하던 중이었다.

 

"인도에서 릭샤(자전거 인력거)를 탔는데 릭샤 왈라(릭샤 기사)가 자꾸 '실크숍'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거예요. 실크 가게에 가자는 거구나 싶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죠. 그런데도 결국은 실크가게에 도착했어요. 릭샤 삯을 두고 말싸움이 시작됐죠. 그때 양복 차림의 중년 신사가 내 사정을 듣고는 릭샤 왈라를 무자비하게 때렸습니다."

 

알고 보니 그건 이씨의 잘못이었다. 인도에서 고개를 젓는 것은 승낙의 표시로 우리와 정반대다. 이씨는 "그 릭샤 왈라에 대한 사죄의 뜻에서, 또 사람들이 나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교문화학을 공부했고 책까지 쓰게 됐다"고 했다. 더 극단적인 사례도 있었다. 1972년 미국 대학생 3명이 터키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히치하이크를 하다 성폭행당했다. 터키에서 엄지손가락 세우기가 동성애 상대를 구한다는 뜻임을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손짓언어도 생성과 소멸, 모방 등의 과정을 거친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손짓언어 대부분은 일제시대와 그 이후 서구화 과정에서 들어온 것이다. 두 손을 높이 드는 만세 동작과 화났다는 뜻으로 두 손 검지를 머리에 대는 것은 한국과 일본에서만 통한다. 행운을 빈다는 뜻으로 포르투갈인이 사용했던 '피코'(검지와 중지 사이에 엄지를 끼우는 것)는 일본으로 흘러가 '달갑지 않은 손님'을 가리킬 때 쓰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성적인 모욕을 담게 됐다.

 

"요즘 20대들은 피코를 잘 모릅니다. 세대를 거치며 점차 소멸한 거죠. 대신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중지를 세운 동작이 피코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손을 둥글게 모아 하트를 만들거나, 주먹을 볼에 비비며 부끄러움을 표현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동작이죠."

 

지역별 손짓언어를 보면 그 문화를 읽을 수 있다. '술 한 잔 하자'라는 뜻을 지닌 표현법이 한 예다. 맥주를 즐기는 동유럽에서는 커다란 맥주잔을 주먹으로 표현하고, 포도주 문화권인 중부유럽에서는 포도주병 마개를 따는 시늉을 한다. 독한 보드카를 마시는 슬라브 지역에서는 술기운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손으로 튕겨 표현하는 식이다.

 

이씨는 빠르게 다문화사회로 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350여명의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리고 유학생들을 인터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대부분의 외국인은 한국인의 손짓이 크고 많은 데 놀랐다고 답했다. 구호를 외치거나 단합을 유도하는 손짓언어도 격동기를 거쳐온 한국적 표현방식이다.

 

"한국인은 너무 쉽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분단 상황에서 많은 부침을 겪은 우리의 불안 수준을 잘 모르기에 하는 말이죠. 반대로 우리도 그들을 잘 모릅니다. 다문화 가정이 급증하고 우리 기업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지는 이때, 손짓언어는 서로를 이해하는 첫걸음입니다."

 

 

2009. 6. 06. 정경렬 기자 kr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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