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링컨과 스탠턴

부산갈매기88 2009. 9. 11. 10:36

실패라면 링컨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인들이 존경하며 떠받드는 그는 36번이나 실패한 사람이다. 그가 실패와 고통을 처절하게 맛보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자신의 최대 정적(政敵)인 스탠턴을 전시국방장관으로 발탁할 수 있는 자질이 되었을까? 링컨은 기꺼이 임명했다. 요즘으로 치면 오바마 대통령이 라이벌 힐러리를 국무장관에 기용한 것과 같다. 참모들의 반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스탠턴만한 장관 감이 있다면 데리고 오라. 그럼 쓰겠다.”

 

1850년 미국의 워싱턴에서 애드윈 스텐턴이라는 변호사와 에이브러햄 링컨 변호사가 특허소송으로 맞붙었다. 스탠턴은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똑똑하고 유능해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링컨은 시골에서 태어나 학교라고는 6개월밖에 다니지 않은 촌뜨끼였다.

 

스탠턴은 미남에 호감을 주는 이목구비였지만, 링컨은 야윈 얼굴에 주름이 많고 어깨는 구부정했다. 스탠턴은 성격이 직선적이고 오만해 촌뜨기 링컨 변호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같은 호텔에 묵어도 스텐턴은 링컨을 무시했다.

 

링컨인 대통령이 되었다. 같은 정치인이 된 스탠턴은 링컨을 혹독하게 비평했고, 날카로운 라이벌로 10년이나 공격했다. 그해 4월 남북전쟁이 터졌다. 링컨의 북군이 계속 밀리자 링컨은 새로운 장관을 찾았다. 이때 떠오른 인물이 스탠턴이었다. 정적 스탠턴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명장의 이름을 남겼다.

 

1865년 링컨이 워싱턴 시내 포드극장에서 공연을 보다가 암살범의 권총을 맞았다. 링컨은 길 건너편 가정집 1층 침대에 눕혀졌다. 많은 각료가 침대를 지켰다. 가장 오래 링컨의 곁을 지킨 사람은 스탠턴이었다. 링컨이 숨을 거둔 후 스탠턴은 말했다.

 

‘시대는 변하고 세상은 바뀔지라도 이 사람은 온 역사의 재산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그 이름 영원하리.“

 

역사 속에 링컨이나 스탠턴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우리는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단점을 보지 않고 장점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단점은 우리를 낙심케 하지만 장점의 희망이 우리의 삶을 전진하게 한다.

 

 

우와 <잘 풀리는 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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