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명문가인 존 F. 케네디의 가문

부산갈매기88 2009. 9. 14. 09:09

미국의 존 F. 케네디 집안은 “꿈은 이루어진다.”, 대를 이어 노력하면 훌륭한 가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부모의 헌신과 노력의 산 결실이다. 그 가문의 시작은 비록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가난한 한 가정이 3대에서는 큰 부자가 되고, 4대에서는 미국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은 대통령일 탄생할 수 있었다.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지프 패트릭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미국 명문대인 하버드 대학을 아일랜드계로서는 처음으로 입학하였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부와 명성을 쌓은 영국계의 명문가로부터 배척을 받자 아버지는 자녀를 일등이 되어야 한다며 격려하여 이끌어주었다. 다행히 아들은 공부나 야구에서도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내며 경쟁에서도 항상 일등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아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영국계의 명문가 자제들과 잘 어울리며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졸업을 한 후 보스턴에서 영국계가 장악하던 은행의 은행장이 되므로 영화사업과 경마장 사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여 들어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영국의 대사로 외교관으로 일하기도 하였으며 대통령 후보로도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보스턴에서 학창시절의 인맥들을 잘 활용하여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탁월하였다. 30대에 그는 벌써 재테크 사업과 부동산 투자로 큰 성공을 거두고 보스턴의 시장 딸인 로즈와 결혼하여 그 사이에 4남 5녀를 두게 되었고, 그중 둘째 아들이 미국의 최연소 대통령으로 케네디가 가문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존 F.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28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43세에 최연소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4남 5녀를 길러낸 케네디의 어머니는 가족들의 식사시간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자녀들은 꼭 식사시간을 지켜야만 했고, 시간을 엄수하는 것은 시간 관리와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습관이 형성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식사시간에는 가족들이 대화를 하면서 하루 일과나 아버지의 사업이나 세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하였다. 어릴 때부터 식사예절을 배우고 좋은 식습관을 갖도록 부모가 가르친다. 어려서부터 식탁의 문화를 배우고 대화의 요령을 익히며 부모를 도우며 참여하도록 하므로 결혼 후에도 부부가 자연스럽게 가사 일을 분담하게 된다.

 

어머니 로즈는 식탁에서 자녀들이 토론하는 자리로 유도하기 위하여 신문이나 잡지에서 이슈되는 주제들을 게시판에 붙여두고 그 문제들을 생각해 보도록 질문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도록 하였다. 자녀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하고 듣고 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뉴욕타임지> 기사가 대화의 되어 읽지 않고서는 식탁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자녀들에게 토론하고 대화하는 법을 지속적으로 훈련을 하게 하였다. 케네디의 아버지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라는 강인한 정신과 인내력을 키워준 사람이라면, 어머니는 정서적으로 자녀들의 작은 부분까지도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 분이었다.

 

자녀들에게 매사 신경을 쓰고 체계적으로 관리를 하였다는 것이 그녀의 육아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로즈 여사가 영국주재 대사부인으로 지낼 때 자녀들의 성장과정의 특성이나 병원기록, 성적관리 등의 자녀육아 카드 파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자녀교육의 본보기로 대서특필하기도 하였다. 케네디는 자서전에 “아버지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케네디 가문의 시작은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케네디의 증조부인 패트릭 케네디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1848년 아일랜드의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신대륙 미국행 배를 타고 혼자서 이민하였다. 그는 보스턴에 정착하여 위스키 통을 만들어 팔면서 전차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케네디의 증조부인 패트릭은 아들 패트릭 조지프와 세 딸을 두고 아직 가난을 면치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죽자 문구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큰아들인 패트릭 조지프가 초등학교를 중퇴하여 일선에서 막노동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알뜰하게 막노동으로 번 돈으로 술집을 운영하여 큰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술집을 하면서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앞장서서 도와주기도 하고 아일랜드인의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동참하였다. 아일랜드 이민계에서 중요한 역량을 차지한 패트릭 조지프는 주의회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활동에 몸을 담기 시작하였다. 그의 정치적인 출발은 후에 케네디의 정치가문의 초석을 닦았다.

 

패트릭 조지프 케네디 가문은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날린 명문가이지만 큰아들 조가 군대에서 사고사로 죽고, 케네디가 피살당하고, 카틀렌 딸이 비행기 사고로 죽고, 일곱째 아들 로버트는 피살당하여 죽임을 당했다. 가정의 가장 큰 불운은 피할 수 없었다. 존 F. 케네디와 재치는 세 자녀를 두었지만 큰 딸만 생존하였으며 존은 비행기 사고로, 패트릭은 출생 직후 사망으로 모두 재키 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가족들이 무병장수가 행복이라면 이런 의미에서 매우 불운한 명문가의 그늘임에 틀림없다.

 

 

비즈프라임 <부자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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