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어릴 때 별명은 ‘오와리(지금의 나고야)의 바보’였다. 여기서 바보란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학업 성적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처신을 현명하게 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중시하는 처세술과 동떨어진 행동을 한다는 의미였다.
간단히 말하면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이미 용도 폐기돼야 하는 낡은 전례와 관습, 처세술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가가 오와리의 바보다.
오다 노부나가가 자란 시대는 전국시대가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다이묘(영주)가 다른 다이묘를 정복하는 통일전쟁은 전국시대 후반부에 벌어진다. 전반기에는 외부의 전쟁보다 내부의 전쟁이 더 큰 문제였다. 다이묘의 가신, 심지어 하급 무사가 성장해서 다이묘의 자리를 찬탈하고, 형제·일가 친척 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그 밑의 가신, 무사 집안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오다 노부나가의 집안도 가신 출신으로 부친 노부히데의 활약으로 오와리의 패자가 됐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장군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거듭 공격을 받았고, 아버지의 형제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혼돈 이전의 상태가 좋아 보이고, 이미 상실된 권위에 집착하는 경향이 생긴다. 하지만 바보 노부나가는 그것을 거부했다. 노부나가의 입장에서 좋았던 과거는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의 혼돈을 낳은 원인’일 뿐이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린 노부나가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됐다. 흔히 노부나가의 성격을 ‘새가 울지 않으면 베어 버린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 때문에 무수한 오해가 생겼다. 그가 성급하고, 잔혹하고, 부하들의 간언(諫言)을 무시하는 제멋대로인 인물이었다면 결코 그 자리까지 가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는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운도 능력 있는 사람에게 따라 온다.
노부나가의 선진적 사고가 군사 분야에서 발휘된 전투가 나가시노 전투다. 곡창과 항구를 장악한 노부나가 병사들은 부유하기는 했지만 농부로 구성돼 전투력은 그리 강하지 못했다. 당시 최강의 군대는 험악한 관동지역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다케다 신겐의 기마대였다. 다케다 신겐은 병사했지만 그의 기마대는 건재했다.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는 노부나가를 치기 위해 나가시노 성을 공격했다. 가쓰요리가 노부나가를 치기 위해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를 지나야 했다. 나가시노는 이에야스 영지의 중앙부 위쪽으로, 가쓰요리가 이곳을 점령하면 단숨에 이에야스의 방어선을 관통해서 오와리로 들어올 수 있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노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가쓰요리의 병력은 1만5000명, 노부나가-이에야스 연합군은 3만8000명이었다. 압도적 열세였지만 최강의 다케다 군단은 두려워하지 않고 기마대를 동원해 정면 돌격을 감행했다.
노부나가는 2㎞가 넘는 마방책을 설치하고 조총으로 대응했다. 다케다의 기마대는 신무기였던 조총 사격 앞에 허무하게 궤멸됐다. “그날 나가시노의 마방책 앞에서 울린 총성은 낡은 일본을 지배해 온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이 전투에 감명을 받은 근대의 일본인들은 나가시노 전투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의 역할은 과도하게 과장됐다고 본다. 신겐의 기마대도 부풀려졌다. 노부나가의 군대는 약하지 않았다. 그들은 충분히 잘 조직돼 유연한 전술운용 능력이 있었고, 예하 부대들은 적극적이고 훌륭한 지휘관들에 의해 통솔됐다. 전술에서 지형지물의 이용 능력은 기본이지만, 노부나가 부대는 야전 공병술에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규모와 속도를 보여줬다. 군사 전문가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선진적이고 감동적인데,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렇다 보니 조총과 기마대라는 자극적인 설명방식이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부나가 군대의 전술적 역량의 배경에는 탁월하고, 자기개발에 열중하는 야심 찬 지휘관들이 있다. 모든 봉건사회가 그렇지만 중세봉건사회는 신분과 직업을 철저하게 따지는 시대다. 사람은 하늘이 내린 신분과 직업이 있고, 그에 따른 분수와 예의범절이 있다. 법과 관습으로 그것을 지키도록 강요했고, 서로 간의 교제나 결혼도 엄격히 제한했다.
노부나가는 우선 이것을 깨트렸다. 노부나가는 혁명가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으니 깨트렸다기보다는 그것의 약점을 파고들었다는 표현이 낫겠다. 소위 무한경쟁의 시대, 하극상의 시대에 산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인재를 등용할 때는 유리천장을 선호하고, 형식과 격식으로 자신들을 옥죄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인재등용의 개방성에서 노부나가는 앞서 나갔다.
순종적 인재보다 야심 찬 인재 뽑아야
노부나가 만년에 그를 보좌한 지휘관급 무장으로는 3명을 꼽을 수 있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를 아내로 삼은 시바타 가쓰요리, 아시가루(평민 보병) 신분에서 대장으로 승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지방 무사 가문 출신으로 노부나가의 장인이었던 사이토 도산의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다.
이 중 아케치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아내 노히메와 친척 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도산이 죽자 노부나가에게 귀순하지 않고 노부나가의 숙적이었던 아사쿠라가로 갔다. 일본의 인기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여기에 착안해 노히메와 미쓰히데 간에 어린 시절 풋사랑 수준의 러브라인을 그려 넣기도 했다. 좌우간 이쯤 되면 노부나가로서는 미쓰히데가 얄미울 법도 한데, 나중에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위해 공을 세우고 휘하로 들어오자 서슴없이 받아주고, 대장급으로 키웠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미쓰히데가 쿠데타를 일으켜 노부나가를 살해한 것이다. 쿠데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쓰히데를 제압한 후 노부나가의 아들을 밀어내고 자신이 후계자가 됐다.
노부나가는 이들이 지나치게 야심적이고 위험한 인물인 것을 몰랐을까? 노부나가에게 이런 위험성을 경고했다면 아마도 노부나가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호랑이 새끼를 거느리지 않고 어떻게 늑대 떼들과 싸울 수 있는가? 호랑이를 두려워해서야 어떻게 조련사가 될 수 있는가? 조련에 실패하면 호랑이 밥이 될 것이고, 호랑이 없이 싸우면 늑대 밥이 될 것이다.”
모든 조직이 인재등용을 외치면서도 실패하는 이유는 호랑이의 야심을 위험하게 보고, 순종적인 인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도전정신과 승부욕을 끌어내는 동인이 바로 야망이다. 이것이 결여된 능력은 자기보존, 현상유지의 틀 안에서 머물 뿐이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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