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문둥이 형제 여러분!

부산갈매기88 2009. 10. 1. 13:53

하와이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우리나라 사람이 맨 처음에 정착한 곳도 하와이인데, 지금 그곳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와이를 ‘천국에 비해 단지 하나가 부족할 뿐인 곳’이라는 의미로 ‘999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듯 아름다운 하와이 군도에 1800년경에 나병이 돌기 시작했다. 나병은 살을 썩게 만드는 무서운 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코나 귀가 썩어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문드러져 없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무서운 병이다 보니 사람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 곁에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게 마련이다.

 

나병에 걸리면 가족까지도 환자를 돌보지 않고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국가가 나서서 환자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돌보게 된다.

 

1870년에 이르러 하와이 지역의 나병환자 수가 아주 많아지자 나라에서는 환자들을 몰로카이 섬의 한 지역에 모았다. 그 섬 북쪽에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다른 한 면은 절벽으로 막힌 곳이 있는데, 그곳에 나병 환자를 수용할 시설을 지은 다음 거기에 그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나병환자들은 거기에서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다가 죽어갔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위로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희망이라고는 없는 그들은 거기에서 괴로움으로 몸부림을 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곳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다미안으로 그는 카톨릭 신부였다. 1873년 그는 자청하여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치솟은 절벽 아래 파도가 통곡하듯 울부짖는 그곳에서 피는 썩고 손발은 고름으로 얼룩진 나병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후덥지근한 어느 날 오전의 일이었다. 그날 다미안 신부의 성당에서는 일요일 예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신자들은 모두 나른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신자들의 눈에 졸음이 슬금슬금 찾아올 무렵 그는 강대로 올라갔다.

 

다미안 신부는 신자들에게 강론을 할 때 “나의 형제 여러분....”이라는 말로서 강론을 시작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그는 그날 느린, 그러나 의미심장한 말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우리 문둥병자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 말은 다미안 신부 또한 나병환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다미안 신부는 진심을 다해 나병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 또한 나병환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미안 신부가 평소에 늘 바라고 있던 일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나병 환자들의 친구가 되려면 자신 또한 나병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다시 또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나이 마흔아홉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 종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오이오이.....” 하는 하와이식 울음소리가 그 종소리에 섞였다. 곧이어 다미한 신부에 대한 기사가 전세계로 타전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온 세계 사람들이 다미안 신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오랜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를 대표하는 인물에 선정되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분을 복자(福者: 예비성자)로 추존하였고, 신부의 고국인 벨기에는 그분의 유해를 자기 나라로 옮겼다. 다미안 신부의 유해가 벨기에의 엔트워프 항구에 도착하자 검은 예복 차림의 벨기에 국왕이 그를 정중하게 맞았다.

 

다미안 신부의 죽음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나병을 연구하기 위한 ‘다미안 연구소’가 세워졌다. 하와이의 칼라우파파 선착장에는 다미안 신부의 거룩한 삶을 추모하는 십자가가 세워졌다.

 

오늘날까지 세워져 있는 그 십자가에는 그분에게 꼭 맞는 다음의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동화출판사 <행복은 따뜻한 마음에서 온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