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박태준

부산갈매기88 2009. 10. 16. 09:07

한국경제에 쇳물을 부은 ‘철의 사나이’

포스코는 한국의 경제 기적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한국이 지난 1960년대 1인당 국민 소득은 80달러의 세계 최빈국인 농업국에서 공업국가로 전환하는데 있어서 포스코가 담당한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다.


포스코의 창립자이며 제1대 회장을 역임한 박태준(1927~)은 1965년 어느 날, 경제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던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부름을 받는다.


“경제 개발을 하려면 산업의 쌀인 철강 산업을 일으켜야겠어. 자네가 그 일을 맡아주게.”


박태준의 육사생도 시절에 박정희는 육사교수로 그에게 탄도학을 가르친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저는 용광로도 본적이 없는 문외한인데 어떻게……”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임무를 부여받은 박태준은 그때부터 ‘철의 사나이’로 변신한다.
그는 모래벌판으로 유명했던 포항 영일만의 허허벌판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일이 없는 39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포스코 건설의 첫삽을 떴다. 그러나 세계은행(IBRD)은 ‘1968년도 한국경제평가 보고’에서 한국이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경제성이 없으니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연기할 것을 주장했다. 망연자실해진 박태준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차관을 요청했다. 그러나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거나 기술이전을 해주겠다는 나라가 없었다.


어떻게든 자금줄을 뚫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며 뛰어다니던 그는 한일협정 때 농어업분야에 사용하기로 돼 있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직접 일본 정재계 지도자들을 설득해서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기술을 제공받는 데 성공했다.


1970년 4월 1일, 연산 103만톤 규모의 1기 설비를 착공했고 그날부터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려 눈도 뜰 수 없는 공사현장에 매달려서 자기 손으로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를 만들겠다는 투지와 야심으로 날을 새웠다. 그때 박태준은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모두 영일만에 우향우해 투신할 수밖에 없다는 결연한 말을 남겼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가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서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 제철보국! 이제부터 이 말은 우리의 확고한 생활신조요, 인생철학이 돼야 합니다.”


이 ‘우향우 정신’은 지금까지도 포스코인의 뇌리에 남아 있는 포스코 정신이자 자산이 됐다.
1973년 6월 9일, 드디어 1기 설비가 건설착공 3년 2개월 만에 준공돼, 첫 쇳물을 생산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여기서부터 ‘포스코의 신화’는 시작됐다. 그 후 포스코는 네 번의 확장사업 끝에 1983년 조강 910만 톤 체제를 완공한데 이어, 1985년 광양 1기 착공을 시작으로 1992년까지 450만평의 바다를 메워 세계 최신예 최대 광양제철소의 건설에 성공했다.


그 후 포스코는 조강 5천만 톤에 이르는 세계 5위의 종합제철업체로 떠오르며 놀라운 성적표를 보여주었고 그 신화의 중심에는 박태준이 있었다. 그는 자본, 기술, 경영능력도 없는 가난한 후진국에서 사업타당성이 없다는 국제금융기관의 논리를 뒤엎고 온갖 장애를 극복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철강회사를 만들어낸 불가사의 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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