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때로는 우직하게 결심을 실행하라

부산갈매기88 2009. 12. 3. 09:38

미국 부동산업계의 황제 도날드 트럼프는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human network'를 치밀하게 형성해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1968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와튼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한 트럼프는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가 운영하던 부동산 개발회사에서 정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향의 작은 사무실은 그의 커다란 꿈을 펼치기에는 너무나 좁은 무대였다. 그는 좀더 다이내믹한 뉴욕의 맨하튼으로 건너가 도전장을 내밀고 싶었다.

 

1971년 26세가 되던 해 고향을 떠난 트럼프는 꿈꾸던 맨하튼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발품을 팔아 도시 구석구석을 다니며 부동산 시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맨하튼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에게 있어서 정작 급선무는 인맥을 넓히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사회 유명 인사들과 부호들이 모인다는 뉴욕의 사교클럽에 가입하는 것이 최선일 듯했다.

 

하지만 그만한 클럽에서 무명의 영세 사업가에게 문을 열어줄리 만무했다. 그는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클럽에 전화를 걸었지만, 이름을 밝히는 순간 상대방은 욕을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두 번째 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조소와 비난의 목소리뿐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한 가지 꾀를 쓰기로 했다. 클럽에 전화를 걸어 이사장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긴 상대방은 이사장의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트럼프는 회심을 미소를 지으며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클럽에 가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사장은 동의도 거절도 안 하면서 대신 술이나 한잔 하자고 제안해왔다. 사실 술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는 그였지만 이사장의 마음을 열기 위해 트럼프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 후로도 이사장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트럼프는 그의 편안한 술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반년 뒤에는 클럽의 엄연한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는 트럼프가 수많은 거물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넓고 탄탄한 인맥을 구축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1973년 맨하튼의 부동산업계가 갑작스런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각종 악재가 겹치면서 도시 전체에 불던 부동산 개발붐이 일순간에 잠잠해짐에 따라 뉴욕 시민들은 도시의 장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뉴욕의 불황은 트럼프에게 있어 하늘이 내린 값진 기회와도 같았다. 그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값나가던 부자들이 더 이상 그림의 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해 여름, 트럼프는 신문을 통해 한 가지 희소식을 접하게 된다. 펜실베이니아 중앙철도공사가 빅토르 파밀리에게 페쇄된 60호, 34호 기차의 부지에 대한 매각을 위탁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그는 빅토르 파밀리의 신임을 얻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브루클린의 작은 회사 이름을 ‘트럼프그룹’으로 개명했다. 좀더 규모있고 실력을 갖춘 조직 같은 인상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명목만 회사일 뿐 간판도 없는 작은 사무실 몇 개에 불과했다.

 

다음 날 아침 트럼프는 빅토르 파밀리에게 전화를 걸어 부지 매입 의사가 있음을 밝히고 상담을 위한 방문약속을 잡았다. 품위 있는 외모에 패기와 능력까지 갖춘 트럼프는 빅토르와의 첫 대면에서 믿음직한 인상을 남겼고, 마침내 펜실베이니아 서쪽에 위치한 기차역 부지 두 곳을 6,200만 달러에 매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는 매각주인 펜실베이니아 철도공사로부터 ‘트럼프그룹’측에 부동산 개발비용을 제공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얻어냈다. 아무리 성장가능성을 높게 인정하더라도 매각자가 매입자의 개발비용까지 부담하는 것은 정말이지 이례적인 일이었다. 결국 상상 속의 ‘트럼프그룹’은 트럼프 자신에게 생각지 못한 기쁨과 기적을 가져다 주었다.

 

정판교 <거상의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