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

한국 최초의 UN 전문기구 CEO: 이종욱 박사의 삶

부산갈매기88 2009. 3. 26. 10:54

 

이종욱 박사는 2003년 한국인 최초로 UN산하 전문기구인 WHO 제6대 사무총장에 당선돼 현안사항이던 담배규제협약 체결을 이끌어냈으며, 집요한 조정을 통해 국제보건규칙 개정을 단기간에 성사시키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해 온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립심이 매우 강하여 학교에 다닐 때, 종로구청장을 지낸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과외교사를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만큼 강한 자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강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후배들이 따랐다.

 

그는 당초 서울대 공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질병퇴치를 통한 사회봉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의학을 공부해 1976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재학중 경기도 안양에 있는 성 나자로 마을에서 일본에서 모금한 돈으로 한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간호하고 있던 가부라키 레이크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질시와 냉대를 받았던 나병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나자로 마을에서 헌신적인 열정을 쏟았으며, 졸업 후 봉사의 인생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주변 환경이 열악하고 각종 질병이 만연하던 서사모아섬 열대의료센터에 지원해 열대풍토병, 나병 연구에 매진했다. 한국 원양어선 선원 진료에도 나섰다.

 

1983년 인류건강 향상에 기여하겠다는 일념으로 WHO에 입사해 남태평양 오지에서 한센병 환자 의료봉사를 시작했으며, 1994∼1998년 WHO 본부 백신국장 재직시에는 예방접종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시아 등 빈곤국 어린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WHO회원국들에게 적극적인 지원과 호소로 펀드를 조성했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로 지구상에서 풀리오(소아마비)의 완전 퇴치를 눈앞에 두고 있다.

 

1998∼2002년 WHO사무총장 특별대표, 결핵국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북한을 방문해 의료실상을 살피고 인도적 측면에서 북한의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적극 지원했다.

 

서남아시아 쓰나미와 인도, 파키스탄의 지진 등 대규모 재난 재해시 이재민 구호에도 적극 나섰으며, 사스를 비롯해 범세계적인 유행과 피해가 예견되는 신종 인플루엔자 등 질병 퇴치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

 

UN 사무총장이라면 국가 원수급 예우를 받지만, 그는 “가난한 나라가 낸 분담금도 있는데 그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며 1500cc 하이브리드 차를 승용차로 몰았다. 비행기를 탈 때에도 항상 1등석 대신 2등석을 고집했다. 그는 흔한 아파트 한 채도 가지고 갖지 않고,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기에 사람들은 그를 ‘아시아의 슈바이처’라고 불렀다.

 

<타임>지는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했다.

그는 2006년 5월 22일 WHO 총회 준비 도중 과로로 쓰러져 61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 이 세상 떠날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 것에 너무 목숨 걸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