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무소유를 실천한 지도자 간디

부산갈매기88 2009. 3. 30. 09:40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그는 깡마른 체격에 물레로 실을 자아 직접 옷을 만들어 입을 정도로 무소유를 실천한 정치지도자다.

 

그는 200년에 걸친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을 벌이면서 단식과 금욕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고 ‘마하트마(위대한 영혼)’ ‘바푸(아버지)’로 불리며 인도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18세 때 런던에 유학해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 변호사로 개업했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고 간디는 인도처럼 영국의 속국이었던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간다. 남아프리카 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인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선거권은 고사하고 재산 소유권도 없었고 백인이나 기독교인들과 함께 걸을 수도 없었다.

인도인들의 인권 상황이 간디에게 영감과 실천의 용기를 주었다. 그는 인도인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해서 지도자로 활동했다. 결국 그의 투쟁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아시아인 구제법이 제정됐고 이 투쟁으로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간디에서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됐다.

 

남아프리카에서 사명을 다한 간디는 1915년에 귀국해서 정치에는 간여하지 않으며 농촌구제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문맹상태에서 무지와 빈곤의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는 인도를 구제하는 길은 농촌구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방적기로 만들어진 영국 옷 대신 인도인 스스로가 물레로 만든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영국제 옷을 벗어던지는 것이 인도인들은 영국에 대한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고 민중을 계도했다.

 

그러던 중 1930년, 영국은 제염 금지를 발표하고, 인도인들에게 영국제 소금을 사라고 강요했다. 간디는 영국의 야만적 처사에 반대하고 전국민을 향해 투쟁할 것을 호소하며 혼자서 해안까지 360㎞를 걸어가 소금을 만들기 위한 행진을 시작했다. 이 행진은 많은 민중이 가세해서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해안에 도착해 가마에 바닷물을 넣고 끓였다. 이 ‘소금행진’은 그때까지 침체돼 있던 인도의 민중운동을 부추겨 그 뒤 잇따른 대대적인 반영운동의 발단이 됐다. 이로 인해 간디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해방운동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이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그는 인도를 하나의 감옥으로 보고 전화(戰禍)와 굶주림으로 거칠어진 인심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인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5억 인도인이 하나같이 동참했고 결국 영국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타고르의 방문을 받아 ‘마하트마(Mahatma)’라고 칭송한 시를 받고,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됐는데, 그의 위대한 영혼은 인도는 물론 전 세계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인도의 수도 델리에 있는 간디의 묘에 가 보면 인도인들의 간디에 대한 숭배는 신을 섬기는 수준이다.

 

최근 인도인들은 서구 과학문명과 제국주의 침략에 굴복 당했던 과거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21세기 인류문명 건설에서는 기어이 서구문명의 장점을 따라잡고 동양문명의 장점을 접목시켜 세계문명을 주도해 가겠다는 야망과 열정을 가지고 간디정신을 계승해 나가고 있다.

 

<중소기업뉴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