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오스카 쉰들러

부산갈매기88 2010. 4. 12. 08:56

독일 태생으로 체코에서 사업을 하였으며, 여성 편력이 화려했고 술과 도박을 즐긴 오스카 쉰들러(1908-1974). 그는 나치 간부들과 결탁하여 폴란드에 그릇 공장을 세워 임금을 주지 않고 유태인 노동력을 착취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이들 부부는 독일인으로 독실한 신자였기에, 노동가치가 없는 유대인들이 짐짝처럼 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쉰들러는 인간적 고괴 끝에 유대인을 살리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공장을 나치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피난처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치를 설득하여 1천 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빼돌리는 데 성공한다. 그 구실은 폴란드 크라코우에 신설한 독일군 무기 도금공장에서 일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나치 친위대 장교 괴트와 협상하여 돈을 지불하고 자기의 고향 체코로 데려갈 유태인 1,100명의 명단을 작성한다. 체코 행 기차에 탑승한 유대인들은 탈출에 성공하고 쉰들러의 체코 공장에서 종전을 맞는다. 유대인들은 전범으로 몰릴 쉰들러를 염려해 금니를 뽑아 만든 반지에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온 천하를 구한다.’는 탈무드의 글귀를 새겨 모두이 서명이 된 진정서와 함께 전했다.

 

그때 쉰들러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 손가락에 끼어 있는 금반지를 빼 들고는 이렇게 절규한다.

“나는 이 금반지로 유대인의 생명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구두요? 한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코트요? 이 소매단추요? 세 명은 더 살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쉰들러는 더 많은 유대인을 수용소 가스실에서 살리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또한 그때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여러 명이 생존해 있다. 그중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사는 위흐터 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쉰들러 내외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도왔다. 그들은 식사도 우리와 함께 하였고 정말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고 희망의 빛이었다.”

 

오스카 쉰들러는 1974년에 죽었고, 부인은 아르헨티나에서 유대인들이 돈을 모아 마련해 준 시골집에서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2001년에 죽었다. 오스카 쉰들러는 예루살렘에 묻혀 있다.

 

쉰들러 부인은 남편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생과 위험은 날마다 연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행복했습니다. 나 혼자의 행복을 찾는 것보다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자의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 엄청난 일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