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내 아들만은 나 같지 않기를

부산갈매기88 2009. 5. 25. 08:08

아내를 잃고 혼자 살아가는 노인이 있었다. 젊었을 때는 힘써 일하였지만, 이제는 자기 몸조차 가누기가 힘이 들었다. 그런데도 장성한 두 아들은 아버지를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

 

어느 날 노인은 목수를 찾아가서 나무 궤짝 하나를 주문하였다. 그런 다음 그것을 가져와 겉은 오래된 것처럼 위장한 다음 안에 유리조각을 가득 채우고 나서 크고 튼튼한 자물쇠 하나를 채웠다.

 

그 이후부터 아들들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어느 때부턴가 아버지의 침상 밑에 못 보던 궤짝 하나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들이 그것이 무어냐고 물으면 노인은 별게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할 뿐이었다.

 

궁금해진 아들들은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그것을 조사해 보려 하였지만 단단한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웬만한 힘으로는 밀어도 꼼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매우 무거운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놀라운 것은 그 안에서 금속들이 부딪치는 것 같은 달그락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그 소리를 듣고 생각하였다. ‘그래! 이건 아버지가 평생 모아 놓은 금은보화일거야!’

 

이렇게 생각한 아들들은 그때부터 번갈아가며 아버지를 모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노인은 죽었고, 아들들은 기대에 차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잔뜩 깨진 유리조각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두 아들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큰 아들은 버럭 화를 내었다.

“내가 당했군!”

 

큰 아들은 궤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생을 향해 “왜? 궤짝이 탐나냐? 그럼 네가 가져가라.”라고 말한 다음 휑하니 나가버렸다.

 

막내아들은 궤짝과 함께 유리조각을 집으로 옮겼다. 아내는 구질구질한 물건을 왜 집에 들이느냐고 짜증을 내었다. 그래서 막내아들은 아내와 타협을 하여 유리조각은 버리고 궤짝만 갖기로 했다. 유리조각을 쓰레기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유리조각을 다 담고 보니, 그 궤짝 맨 밑바닥에 짧은 시구가 적힌 종이쪽지가 나왔다.

 

첫째 아들을 가졌을 때

나는 기뻐서 울었다.

 

막내아들이 태어나던 날

나는 좋아서 웃었다.

 

그때부터 삼십여 년,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그들은 가슴조이며 나를 울게 하였고,

가슴 벅차도록 나를 웃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늙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들은 달라졌다.

지금 그들은


나를 기뻐서 울게 하지도 않고,

좋아서 웃게 하지도 않는다.

 

나는 지금 혼자다.

내게 남은 것은 그들에 대한 기억뿐이다.

 

처음에 진주 같았던 기억,
중간엔 내 등뼈를 휘게 한

행복한 고통이었던 거야.
그러나 지금은

사금파리 유리조각으로 남은 기억.

 

그러나 아아,
내 아들들만은 부디

그 늘그막이 나 같지 않기를!
제발 나 같지 않기를!

 

 

막내아들은 큰소리로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아들딸들이 “아빠!”하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내 또한 그의 손을 잡았다. 네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김정빈 <행복은 따뜻한 마음에서 온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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