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마음의 눈을 가진 아버지

부산갈매기88 2009. 5. 27. 09:45

아들은 매일 밤 책을 읽어주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책을 읽어주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아빠, 그 책속에는 또 뭐가 들어있어요?”

 

책을 꺼내들고 천천히 방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울창한 숲과 늠름한 사자와 재빠른 원숭이가 있단다.”

“저도 그 책을 좀 읽어보면 안돼요?”

 

아버지는 인자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중에 네가 더 크면 그때 보여주마.”

 

그날 아버지는 밀림을 누비면서 동물들과 어울리는 타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쨌든 아들은 아버지가 읽어주는 동화 속 이야기를 들으며 꿈 많고 건강하게 잘 자랄 수가 있었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이사를 하게 된 어느 날,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읽어주던 책들을 상자에 차곡차곡 담고 있었습니다. 순간 자상하게 책을 읽어주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아들은 책을 펼쳐보았습니다.

 

“아!”

 

아들은 너무나 깜짝 놀라 그만 말문이 막혔습니다. 온갖 화려한 그림과 다양한 이야기가 가득할 줄 알았던 책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림은커녕 글자도 하나 없었습니다. 다만, 올록볼록한 점들만 무늬를 이루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점자책이었습니다. 아들은 누가 볼까봐 서둘러 책을 덮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책을 보여주지 않은 이유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아버지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던 이유를 뒤늦게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아들은 교내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탔습니다. 기쁜 마음에 단숨에 달려와 아버지에게 상장과 ‘나의 아버지’라는 제목의 원고뭉치를 내밀었습니다.

 

“내 아들! 자랑스럽구나. 정말 대견해. 나는 너무 벅차서 그러니 당신이 좀 대신 읽어봐요.”

 

아버지는 곁에 있던 어머니에게 원고뭉치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약간 울먹이는 소리로 그 원고를 대신 받아들었습니다.

 

“제가 읽을 게요. 그동안 저를 위해서 아빠가 매일 밤 동화책을 읽어주셨잖아요. 이제는 제가 읽어드릴 차례에요.”

 

아들은 자신이 쓴 원고를 천천히 읽어나갔습니다. 원고를 거의 다 읽었을 무렵 아버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보였습니다. 아들은 입술을 깨물며 원고를 끝까지 읽었습니다. 아버지가 눈물을 감추며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내 아들이 다 컸구나. 이 아빠는 네가 상처를 받을까봐 모든 사실을 숨겨왔는데......”

 

아들은 비로소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울먹였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전 정말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아빠의 이야기는 그 어느 동화책에 있는 이야기보다 훨씬 훌륭해요.”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울었습니다.

 

한상현 <참 행복한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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