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사십년 전의 남편 체온

부산갈매기88 2009. 5. 29. 09:33

젊어서 남편을 잃은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혼자 몸으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고, 미인인데다가 생활력이 강한 그녀에게는 여러 차례 재혼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새 남자를 들이지 않았다. 혹 중매쟁이가 물으면 그녀는 나지막이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사십여 년이 흘러 그녀는 이제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낸 할머니가 되었다. 어느 날, 그녀를 잘 알고 지내던 한 작가가 조용한 시간에 틈을 젊었을 때 재혼을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남편을 배신할 수 없었어요.’라고 대답하였다.

 

작가가 말하였다.

 

“재혼이 반드시 돌아가신 남편에 대한 배신은 아니잖아요?‘”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다만 나는 돌아가신 그분을 잊지 못할 뿐이에요.“

 

“왜요? 남편의 어떤 점이 그토록 할머니를 잊지 못하게 하는가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할머니가 말하였다.

 

“우리 부부는 처음 전라도의 한 시골에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좀더 나은 생활을 해보려고 서울로 오게 되었지요. 그때 우리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더럽고 비좁은 열차였지요. 날씨도 무척 추웠습니다.

 

그때 우린 꼬박 여섯 시간 열차를 탔습니다. 그리고 제 남편은 그 여섯 시간 동안 제 손을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곤 절대로 손을 놓치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손은 저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어요. 차츰 팔까지 아파왔고, 나중에는 온몸이 다 아팠습니다. 몸살이 난 것처럼, 감기가 든 것처럼 머리까지 띵해졌지요.

 

눈물이 찔끔찔끔 났습니다. 마음 약한 저는 이 양반이 왜 어러니 싶어 뿌리치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남편은 너무나도 진지하게, 우리는 서울에 가서 잘 살아야 한다면서, 반드시 잘살아야 한다면서, 나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겠다면서, 잡은 손에 더욱더 힘을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을 마쳤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그때 일을 저는 결코 잊지 못해요. 그분이 그토록 깊은 정을 담아 꼬옥 쥐고 놓지 않았던 제 손을 다른 남자에게 줄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저는 제 손에서 그분의 체온을 느껴요. 제 팔에서, 제 몸에서 그분이 제게 주셨던 그때의 감기 몸살기를 느껴요. 그것이 저를 평생토록 지켜주었던 거예요.”

 

 

동화출판사 <행복은 따뜻한 마음에서 온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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