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과거를 통째로 다 기억해버린다면?

부산갈매기88 2010. 3. 10. 09:53

 

지난 2006년 출간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The Woman who can't forget)'가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USA 투데이'는 저자인 질 프라이스(42)를 대서특필했다. 종교 계통 학교에서 행정직으로 근무 중인 프라이스는 과학자들로부터 자신의 과거를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프라이스는 비상한 기억력 때문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UC 어바인(Irvine)의 신경과학자인 제임스 맥고를 찾아갔다. 맥고는 6년간 프라이스의 기억능력을 연구하고 2006년 격월간 '뉴로케이스'(Neurocase) 2월호에 논문을 발표했다. 그 당시 프라이스의 신원은 비밀에 부쳐졌으나 저서가 출간되면서 비로소 이름이 알려졌다.

 

프라이스는 10살부터 34살까지 기록한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었으므로 연구진들은 그녀의 기억력을 검증할 수 있었다. 프라이스는 14살 이후 매일 겪은 일을 생생하게 상기해내는 초기억(super-memory) 능력의 보유자로 밝혀졌다. 그녀에게 날짜를 말하면 몇 초 만에 그날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그날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낱낱이 생각해냈다. 예컨대 1977년 8월 16일에 대해 질문하면 화요일이었으며 엘비스 프레슬리가 죽은 날이라고 답변했다. 심지어는 특정한 날에 그가 놀러 갔던 곳, 그의 어머니가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 이름까지 상기해냈다. 프라이스는 기억력 덕분에 하루에도 수십 차례 과거의 삶 속으로 되돌아간다고 푸념했다.

 

신경과학자들은 프라이스의 초기억 능력이 어린 시절 뇌가 발육할 때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버드 의대의 질 골드슈타인은 맥고의 요청으로 프라이스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장치로 들여다보고 구조가 특이한 것을 알아냈다.

 

프라이스처럼 뛰어난 기억 능력을 발휘한 인물은 한둘이 아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자크 앵오디(1867~1950)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양치기로 지냈으며 스무 살에 겨우 글자를 배웠다. 하지만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남달라서 계산기와 대결을 벌여 승리할 정도였다. 또한 모월 모일이 무슨 요일인지 금방 맞혔다. 뉴질랜드 태생으로 영국 에든버러대 수학교수를 지낸 알렉산더 에이트컨(1895~1967)도 기억력이 비상했다. 어린 나이에 원주율 값을 1000자리까지 기억하고 3 나누기 408 같은 계산을 단 6초 만에 소수점 16자리까지 풀 수 있었다.

 

'이디오 사방(idiot savant)'이라 불리는 사람들, 즉 어떤 한 분야에서는 아주 뛰어나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두드러지게 능력이 부족한 정신발육 지체자들도 영화 '레인 맨(Rain man)'의 주인공처럼 천재와 맞먹는 기억력을 갖고 있다. 이디오 사방의 상징인 미국의 킴 피크(56)는 지능지수가 87에 불과하고 셔츠의 단추조차 잠글지 몰랐지만 미국 전체의 우편번호를 암기할뿐더러 40년 전에 딱 한 번 들어본 음악을 정확히 읊조렸다. 그의 뇌에는 뇌량(腦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뇌량은 대뇌의 두 반구를 잇는 신경섬유의 띠이다.

 

'USA 투데이'는 프라이스처럼 초기억 능력을 가진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들 역시 맥고에 의해 연구되어 그 결과가 '뉴로케이스'에 발표된 바 있다. 50대 초반 남성인 두 사람은 프라이스에 버금가는 기억력이 비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 사람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확인됐는데, 모자나 인형을 광적으로 수집했다. 맥고는 세 명 모두 뇌 구조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초기억 능력이 비롯되는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단계까지 연구가 진행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프라이스에게 초기억 능력은 축복이자 저주인 것 같다. 그녀는 과거의 좋은 추억을 되살리면 행복을 느끼지만, 나쁜 일들이 자꾸 떠올라 편히 잠들 수 없어 괴롭다고 털어놓았다. 인간에게 적당히 망각하는 능력이 주어진 것은 행운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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